[해가패시브 칼럼 7편] 좋은 집은 첫 단추에서 갈린다 — 통합설계와 초기 의사결정의 힘
오늘은 설계 초기의 결정이 집의 에너지 성능을 어떻게 좌우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도면에 첫 선을 긋는 순간, 집의 형태뿐 아니라 앞으로 수십 년 동안 그 집에서 쓸 난방비와 냉방비도 상당 부분 …
오늘은 설계 초기의 결정이 집의 에너지 성능을 어떻게 좌우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도면에 첫 선을 긋는 순간, 집의 형태뿐 아니라 앞으로 수십 년 동안 그 집에서 쓸 난방비와 냉방비도 상당 부분 정해집니다.
많은 사람이 건축을 보기 좋은 외형을 만드는 일로 생각하지만, 건축의 형태를 정하는 데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열과 빛도 큰 몫을 합니다. 집을 다 지은 뒤 춥고 덥다고 후회하지 않으려면, 설계 첫 단계부터 열과 빛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1. 순서가 뒤바뀐 설계는 왜 실패할까요?
전통적인 설계 방식은 차례대로 넘겨주는 방식이었습니다. 건축가가 먼저 건물의 형태를 정하면, 구조 기술자가 뼈대를 계획하고, 마지막에 설비 기술자가 냉난방 장치를 끼워 넣는 식이었습니다.
이런 방식에서는 큰 문제가 생깁니다. 예를 들어 건축가가 통유리로 된 외관을 확정한 뒤 설비 단계로 넘어가면, 여름 더위를 감당하기 위해 큰 용량의 냉방 설비를 넣을 수밖에 없습니다. 도면을 다시 고치기에는 이미 늦었기 때문에, 그 설비 비용과 에너지는 고스란히 집주인의 부담으로 남습니다.
이 문제를 푸는 방법이 통합설계입니다. 건축가와 에너지 전문가, 설비 기술자가 첫 도면을 그리기 전부터 함께 계획하는 방식입니다. 건물에 필요한 에너지를 미리 계산하고, 햇빛을 받는 방향과 창의 크기, 외벽의 단열을 함께 정할 때 작은 설비로도 사계절 쾌적한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2. 취향보다 물리 법칙을 먼저 적용하는 결정
자동차를 디자인할 때 바퀴를 둥글게 만드는 것은 논쟁거리가 아닙니다. 둥근 바퀴가 가장 잘 구른다는 것은 물리적 사실이고, 차체를 아무리 각지게 디자인해도 바퀴까지 네모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집을 짓는 결정도 같습니다. 패시브하우스를 지을 때 내리는 결정은 세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는 정답이 분명한 결정입니다. 건물을 남쪽으로 향하게 하고, 외피 면적을 줄여 열이 덜 빠져나가는 형태로 만드는 것은 취향이 아니라 물리 법칙의 문제입니다.
둘째는 계산으로 가장 알맞은 답을 찾아야 하는 결정입니다. 창의 크기를 얼마로 할지, 햇빛을 가리는 처마를 얼마나 내밀지는 시뮬레이션으로 확인하며 정합니다.
셋째는 타일의 색이나 외벽 마감재의 질감처럼 건축주의 취향이 반영되는 결정입니다.
실패하지 않는 집을 지으려면 물리 법칙을 먼저 적용하고, 계산을 거친 뒤, 마지막에 취향을 입혀야 합니다. 순서가 뒤바뀌어 마감재나 외형을 먼저 정하고 물리적 조건을 뒤로 미루면, 좋은 자재를 써도 추위와 더위에 약한 집이 됩니다.
산자락을 등지고 큰 통창을 낸 단층 주택 — 마산 진동면 다구리주택 계획안
3. 첫 선이 정하는 것과 데이터의 역할
건물의 형태와 창의 위치, 재료를 정하는 첫 선은 단순한 그림이 아닙니다. 그 집에서 열과 빛이 어떻게 움직일지를 정하는 시작입니다. 그래서 패시브하우스에서 환경을 다루는 요소는 나중에 덧붙이는 설비가 아니라, 건축의 형태를 이루는 바탕입니다.
초기 단계에서 올바른 결정을 내리려면 직관이나 경험에만 기대서는 안 됩니다. 기후 데이터와 건물 형태에 따른 에너지 계산이 먼저 이루어져야 시공까지 계획대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초기 결정을 꼼꼼하게 내리는 것이 집의 수명과 거주자의 생활을 바꿉니다. 해가패시브건축사사무소가 도면에 첫 선을 긋기 전에 에너지 계산을 거듭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계산으로 확인하고 짓는 집, 그것이 '데이터로 증명하는 건축가의 책임'입니다.
이 글이 만들어진 과정
이 연재는 Norbert Lechner의 『Heating, Cooling, Lighting』을 교재로 삼습니다. 책의 챕터 순서에 따라 다룰 주제를 나누고, 각 주제를 패시브하우스의 설계·시공과 연결해 글의 얼개를 구성합니다. 그 얼개를 바탕으로 한 초벌 원고 작성에는 생성형 AI의 도움을 받으며, 최종 원고는 필자가 내용을 검토하고 실무 경험을 더해 다듬은 것입니다. 이번 글은 책의 1장 「건축의 형태를 만드는 열·냉·빛」의 1.11~1.14절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조민구 · 해가패시브건축사사무소